느림속의 여유 두발로
서울『 청 계 천』ㅡ도심의 하천 청계천에서 한강까지 걸어보기 본문
청계천
총길이 5.84km, 하루 물 소비량은 12만t이다.
청계천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시대부터 정비가 시작되었다.
‘개천’이라는 이름이 ‘청계천’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방치되어 있던 청계천은 1925년부터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1937년에는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 복개되었다.
이후 1955년 광통교 상류를 시작으로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또다시 복개되었다.
1960~70년대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청계천은 자연환경과 역사문화를 복원한다는 취지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복원 구간은 태평로에서 신답철교까지이며, 공사는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약 3,900억원을 투입하여 진행되었다.
청계천 복원으로 청계천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
청 계 천(淸溪川)ㅡ하천트레킹 청계광장에서 중랑천 한강성수대교까지
◈언제:2022 /1/14(금요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코스 :청계광장→청계천→중랑천→성수대교→서울숲
◈거리 : 13.82km
◈시간 느림속의 여유시간
◈교통: 대중교통 지하철 버스
◈누구랑 : 마누라와
◈날씨 : 맑음 한파주의보 영하4도
◈시야와 조망 상태: 보통
산책길지도 ↓
산길샘 나들이앱 종합정보 ↓
다시일주일 휴무
지난주에 해파랑을 갖다왔고 이번주는 쫌 진정하자하고 가벼운 산책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청계천을 거닐어보기로한다 몆번 거닐었지만 오래전이라 가끔은 생각이나 오늘 다시한번 거닐기로한다
한파주위보라 예보에는 영하 10도이하라 하더만 막상 도착해보니 그리 춥지는 않고 영하3도쯤 되는것 같은데
그럭저럭 걷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광화문 지하철 5번출구로나오면 청계광장이 나온다
청계광장(淸溪廣場)은
서울 종로구 서린동 14-1에 위치한 서울특별시의 청계천에 딸린 작은 광장이자, 청계천의 발원지이다.
인근에는 동아일보사옥과 서울특별시청이 있다.
2016년 10월 29일에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의 제1차 촛불집회가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
청계광장의 명칭은 청계천복원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던 2005년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지명위원회에서 확정되었다. ↓
광장 시작점에는
스프링 조형물이 우뚝 서있다
청계천 조형물 스프링은
세계적인 "클래스 올덴버그"와"코샤 브루군"의 공동작품입니다.
조형물의 외부는 탑처럼 위로 상승하는 다슬기 모양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다이나믹하고수직적인 느낌을 연출함으로써 청계천의 샘솟는 모양과 문화도시 서울 발전을
상징하고있습니다.또한 전통한복의 옷 고름에서 착안된 푸른 색과 붉은 색의 내부 리본을
자연과 인간의 결합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청계천 조형물 스프링은 도심속에서 재생 된 자연의 기념물이며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의 상징입니다.
개인적으로 내가보기에는 청계천과 무슨연관이 있나 의아해보는데 모양도 별로고 ↓
청계천으로 내려가면 ↓
청계폭포가 있다
여기서 청계천은 시작된다
청계천 물은 어디서 유입될까?
청계천에는 하루 12만t의 한강물과 지하수가 공급되는데
잠실대교 부근 자양취수장에서 퍼올린 9만8천t의 한강물과
도심부 지하철역 인근의 지하수 2만2천t을 합친 것입니다.
자양취수장에서 퍼올린 한강물은 6㎞의 관로를 따라 뚝도정수장으로 흘러간 다음
정수와 소독 과정을 거쳐 물고기가 살 수 있는 2급수로 업그레이드되고
정화된 물은 다시 11㎞의 관로를 따라 청계광장, 삼각동, 동대문, 성북천 하류 등 4개 지점으로 나뉘어
흘러가 각각 폭포, 분수, 터널 등을 통해 청계천으로 유입됩니다.
청계천 유지용수의 정수처리 과정을 먹는 물 처리과정과 비교할 때 여과모래를 거치는 과정이 생략되었고
염소 소독 대신 자외선 살균을 하는 점이 다릅니다.
염소살균을 하지 않는 이유는 염소로 소독시 수중의 잔유염소로 인하여
아가미 호흡을 하는 물고기 등 수중 생물들이 살 수 없기 때문이죠.
이렇게 청계광장쪽인 상류로 유입된 물은 청계천 하류의 마지막 다리로 알려진 고산자교를 지나 한강으로 흘러듭니다. ↓
정비된 하천이기에 보기에는 좋구만 ↓
정비되기전에 청계천이 궁금하다 와~~우 판자촌이 더덕더덕 ↓
중간중간 건너수있는 징검다리도 자주볼수있다 ↓
청계천은?
서울의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봄·가을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 하였다.
따라서 청계천은 비가 적은 봄, 가을은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 (乾川)이었던 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였다. 더구나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집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초기 도성건설사업과 함께 배수를 위한 물길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큰 사업이었다.
개천에 대한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태종 때부터였다.
태종은 즉위 초인 1406년부터 1407년까지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는 등 몇 차례에 걸친 정비로 하천의 모습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마침내 1411년(태종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다음 해인 1412년(태종12)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모두 52,800명의 인부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하였다.
주요 하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 다리를 돌다리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
복원된 광통교
광통교는 태종실록 20권, 태종 10년 8월 8일 기사입니다.
'광통교의 흙으로 만든 다리를 돌 다리로 개축하다 큰 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광통교(廣通橋)의 흙다리[土橋]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貞陵)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石橋]를 만드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복원된다리는 광통교외에 장통교, 수표교(임시보도교), 새벽다리, 나래교, 맑은내다리, 두물다리 등이 있단다 ↓
건널수있는 방법은 징검다리외에 이런 간이 다리도 볼수있다 ↓
청계천은 ?
태종때 개천공사가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다면,
세종은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細川)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종로 남북 쪽으로 늘어선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다.
이것은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1441년(세종 23)에는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 표석을 세웠다.
이 표석에 척(尺)·촌(寸)·분(分) 등 눈금을 기둥 위에 새겨,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수표(水標)이다. 수표는 개천의 수위를 계수화하여 측정함으로써 사전에 홍수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한쌍의 천둥오리 하류로 내려갈수록 자주 볼것이다 ↓
대표적인 동식물들은? ↓
하천만 걸어 지겨울때는 위로 올라와서 걸을수도 있다 ↓
청계천은?
세종때 주목할 만한 사항은
청계천의 성격을 도심의 생활하천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서울을 조선의 수도로 정할 때 풍수학상으로 서울 둘러싸고 있는 외수(外水)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에 대응하여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내수(內水) 청계천이
한강과는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고려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성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하수도 시설이 없었던 당시로서 청계천에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흘러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논쟁에서 세종이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청계천 ↓
동대문 종합시장 근처 긴줄이 시장 한쪽으로 이어진다
무슨줄인가 했더니 줄 끝에는 커피와 붕어빵 파는 곳인데 뭣때눈에 붕어빵때문에? 커피때문에?
아마도 맛집인가 보다 보는것만으로 신기하다 ↓
우리도 슬슬 배가 고프다 점심으로 생선구이를 먹어보고 싶어
생선구이 골목으로 들어선다 첫집부터 여기저기 돌아 다녀봤자 많은 인파로 거시기하다
첫집으로 선택해서 생선구이로 점심을 한다 ↓
한국은 처음이지 프로에서 더 잘 알려진 골목이다
이면수와 갈치구이를 주문했다 하지만 맛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조심한다고 했던 코로나노출에 제일 심한노출을 여기서 한다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점심인파들 때문에 증말 불안해서 빨리먹고 벗어나고픈 생각뿐이다 ↓
점심먹고 다시 청계천으로 내려선다 ↓
낮2기온은 영상으로 돌아온듯 햇볕에 난간의 비들기들이 일광욕을 즐긴다 ↓
잠시후 청계천은
성북천과 합류하고 성북천과 청계천 합수점이다 성북천은 청계전으로 귀속된다 ↓
잉? 청계고가도로 교각이다
어떤이는 흉물이다고 하더만 나는 왜이리 반가운지 ↓
추억의 청계고가도로 ↓
청계천 도보길은 여기서 건너가라한다 ↓
징검다리로 건너가고 ↓
아직까지 하류지만 하수구냄새나 시궁창 냄새는 나지않아 좋았고 ↓
청계천 판자촌을 재현해놓았다 ↓
그때 당시의 판차촌이다 ↓
청계천은 다시 정릉천과 합류하고 역시 정릉천은 청계천의 품속으로 ↓
소의 조형물울 보니 여기가 마장동이라는걸 알겠더라 ↓
이제는 내부순환 고가 도로따라 청계천은 이어진다 ↓
목표는 서울숲으로 잡았고 ↓
이제는 청계천이 하류로 이어지면서 성북천과 정릉천이 합류하면서
생활하수냄새가 조금씩 나는데 ↓
용답역을 지난다 ↓
청계천은 하류로 내려올수록 자연그대로의 하천 모습을 갖추고 ↓
어느덧 청계천도 이제는 중랑천의 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제부터는 중랑천이 바톤을 이어받아 한강으로 이어진다 ↓
이제야 하천이다는 것이 실감난다 시궁창냄새가 새록새록 코를 마비시키는데 ↓
청계천을 품에 안고 중랑천이 한강으로 흘러간다 ↓
한양대학도 보이고 ↓
살곶이다리
성동구 사근동 102번지 남쪽 현재 성동교 동쪽에 위치해 있는 돌다리로서 중랑천에 놓여 있다.
살곶이 앞에 있다 하여 살곶이다리, 또는 살꽂이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 箭串橋라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였다.
그후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는 태조를 태종이 이곳 중랑천 하류 한강가에서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에 꽂혀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살꽂이 혹은 살곶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었으며 濟盤橋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중간 부분이 훼손된 채 양쪽 가장자리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살곶이 다리를 지나 이제 중랑천은 한강과 합류한다 ↓
한강과 합류하는 중랑천 ↓
자~~ 이제 용비교를 건너 서울숲으로 드간다
하천트레킹은 여기서 실질적으로 마감하고 이제는 서울 숲을 지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진행한다 ↓
응봉산도 조망된다 개나리가 봄에는 유명하다 전에 종주한적이 있고 ↓
한강이다 ↓
성수대교쪽으로 진행하다 ↓
한무리의 천둥오리떼들 반상회 하나? ↓
계속 진행 하고픈데 마눌이 이제 힘들다고 짜증이다 할수없이 서울숲으로 탈출한다 ↓
서울숲 입구를 지나 ↓
나와보니 10번 출입구다 버스타기가 애매해 택시로 군자역까지 이동해서 군자역역에 집으로 귀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