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속의 여유 두발로
경기 하남.광주『객산.벌봉.남한산』ㅡ수도권 한적한 산행지 본문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 산성. 사적.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
남 한 산 (南漢山)522m
◈언제:2021/12/17일(금요일)
◈소재지:경기도 광주시.하남시. 서울송파구
◈코스: 선법사→객산→사미고개→벌봉→남한산→봉암성→현절사→산성로터리
◈거리 : 8.50.km
◈시간 :(느림속의 여유시간)
◈교통: 갈때택시 올때버스
◈네비: 주소: 하남시 교산동 55ㅡ1
◈누구랑 : 울부부
◈날씨 : 영하5도 능선에서 칼바람
◈시야와 조망상태: 보통
산길샘 나드리앱 종합정보 ↓
하남시에서 올라가는 남한산성은 북부남한산성 길이다
남한산성 등산은 집에서 가깝기때문에 틈 나는대로 자주한다
광주에서도 올라봤고 성남에서도 올라봤고 송파에서 또한 하남에서도 동서남북
남한산성길을 두루두루 올라다니고 즐기고있는 최적의 내 산행지다 가끔은 카메라들고
다니면서 기록도하면서 다니는데 이번에 하남에서 두번째 기록으로 남긴다
선법사 입구다
승용차를 가지고 오면은 여기다 주차하면 된다
다만 단점은 승용차 회수때문에 원점회기 산행만 가능하다 우리는 남한산에서
산성로터리로 하산하기에 승용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버스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중교통이 매우 불편하다 이제 교산지구로 개발되면 교통은 해결되리라본다
할수없이 집에서 택시로 여기입구까지 왔다 ↓
이길은 하남시 위례둘레길중 최고난이도가 있는 대표적인 둘레길이다 ↓
바로 산으로 오르면 되겠지만 선법사를 들리기위해서 바로 직진 선법사로 들어선다 ↓
선법사입구다 ↓
선법사에 들어오면 눈에들어오는 것이 있다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이란다
보물 제981호. 전체 높이 93㎝, 불상 높이 43㎝. 큰 편은 아니지만 광배(光背)와 대좌를 겸비한 불상이다.
조각술이 정교하고 불신의 비례도 훌륭하다.
불상의 왼편에는, ‘태평 2년에 고석불을 중수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태평 2년은 송 태종 때의 연호로 977년이다.
이 불상에는 새로 조각을 가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불상을 보호하는 전각이나 부속된 건물의 부재 등을 새로 고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 불상의 제작 연대는 950년 이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머리의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는 작은 편이며
미소를 띤 얼굴은 약간 통통하고 단정한 모습이다.
체구는 장대하고, 우견편단(右肩偏袒: 오른쪽 어깨가 드러남)으로 걸친 가사는 왼쪽 가슴에서 접혀져 있다.
광배는 두광(頭光: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과 신광(身光: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이
각각 삼중원으로 이루어졌다. 삼중원 주위에는 화염문(火焰文: 불꽃무늬)으로 둘려져 있다.
대좌는 복판(複瓣: 겹잎)의 앙련좌(仰蓮座)를 이중의 대석이 받치고 중대에는 네 개의 모서리 기둥[隅柱]이 있다.
그 아래 다시 이중의 대석과 단판의 복련좌(覆蓮座)가 새겨져 있다.
불상의 가사 표현은 적조사 철조여래좌상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철조여래상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대좌는 광주(光州) 약사암 석조여래좌상과 같은 원각상의 팔각연화대좌를 부조(浮彫)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조각의 각명한 선이나 유려한 융기선의 옷주름 등 고려 초의 희귀한 편년 자료로서,
한국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불상이 모셔져 있던 절은 알 수 없으나 근처에 넓은 절터가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사찰일 수 있다.
또한 지형으로 미루어보아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약정사(藥井寺)일 가능성도 있다. ↓
현제 선법사는 작은소찰로 남아있다 ↓
선법사 뒤쪽으로 등로가 나 있다 ↓
여기등로는
가끔 바쁘고 어디 멀리 가고싶지 않을때
간단하게 몸좀 풀수있는 등로로 집사람과 자주 이용하는 등로이다 ↓
적당한 오름도 있고
사면에서 지능선으로 올라선다 ↓
지능선에서 조금만 가면 ↓
또다른 능선과 합류한다 ↓
두개의 능선으로 합류한 등로는 이제 객산정상이 기다린다 ↓
객산 정상부다 ↓
워키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객산(客山)은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301m이며 남한산 줄기에 속한다.
옛날 마귀 할멈이 한양에 있는 남산과 같은 산을 만들려고 이천의 도드람산을 떠서
치마폭에 싸가지고 가다가 힘이 들어 이곳에 놓고 그냥 가버렸다는 설화가 있다.
객산이란 이름은 객지에서 온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 아래에는 선법사가 있다. ↓
객산에 올라서면 조망이 훌륭하다
오늘은 시야가 아직은 불편한 시야다 한강과 예봉산이 바로 코앞이다 ↓
들머리를 저 능선끝 마방집 에서 잡고 올라와도 괸찬은 능선이다 ↓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 쉼터를 매우 좋아한다
실컨 조망하고 소나무밑에서 한참을 쉬면서 휴식을 즐기면 특히 여름철에는 시원해서 좋다
여기까지 짧은 산행으로 몸을 풀고 하산한다 하지만 오늘은 객산과 남한산을 찍고 산성로타리로 하산예정이다 ↓
삼각점도 있다 ↓
남한산성 방면으로 진행할것이다 ↓
위례둘레길에서 정상석을 설치했다 한다
전에는 정상석이 없어 허전했는데 정상석이 있어 더 찾아온다 ↓
이제 오솔길 산행으로 ↓
넘 한적하고 넘 평화로운 등로다
다만 오늘은 어제까지 영상이다 오늘은 영하 5도로 바람까지
칼바람이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라 몸의 적응이 힘들다 ↓
얼마쯤 오면은 잘 가꾸어진 묘지들이 있고
그위에서 바라보이는 조망 또한 명품 조망이다 수어장대와 청량산이 바라다보인다 ↓
또한 벌봉과 남한산 조망도 일품이다 ↓
조망을 마치고 등로는 아래로 가라앉는다
사미고개다 하사창동과 하산곡동을 오가는 고개로 새미재 또는 삼외고개라고도 한다
객산과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주 능선중에서 지대가 가장낮은 곳으로 고골사람들이 광주나
이천 우 시장에서 소를 가지고 올때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
우측의 저 아치는 무슨 뜾일까? ↓
사미고개 이정표 ↓
사미고개에서 작은 오르내림을 하다 보니 또다른 고개가 나오는데 막은데미 고개란다 ↓
진행하면서 좌측에 검단산은 항시 가지사이로만 볼수있고 ↓
엄청나게 불어대는 칼바람은 이런 사면으로 들어오면 피할수가 있어 천국길 같다 ↓
다시오르고 ↓
다시 사면으로 들어오고 칼바람 때문에 능선으로 올라서기가 망설여 진다 ↓
마눌은 수시로 간식을 먹어야 한다 너무나 소식하기때문이다 ↓
디뎌 성문에 입성한다 ↓
성벽 성문 성곽 볼때마다 고풍스러운것 왜일까? 성벽의 오래된 이끼때문일까? ↓
여기서 벌봉을 오르려면 성벽 너덜길을 올라야한다 아직은 여기까지 정비는 안되 오르기가 거칠다 ↓
벌봉이다
동장대지 동북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가 포개어져 가파르게 솟아 있고,그 아래에는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나있다.
이 바위를 벌봉 또는 벌 바위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벌이 이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벌암, 벌바우, 벌봉이라 불렀다고 하며,
암문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그 모양 또한 마치 벌과 비슷하다고 한다.
벌봉은 옛부터 영험이 있는 바위라고 해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지금도 이 바위는 정기가 서려 있어 그 영험이 대단하다는 소문 때문에
치성을 드리러 오는 무속 신앙인들이 많다.바위 주변에는 제단도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영험하다는 벌봉에는 청태종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청나라 태종(태종의 고모라는 이야기도 있다)은
용골대를 조선에 비밀리에 보내어 남한산성의지도를 그려오게 하였다.
명을 받은 용골대가 남한산성에 도착해 보니, 남한산성은 하잘 것 없는 조그만 산성이었다.
그래서 구태여 세밀하게 조사하여 지도를 그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대강 대강 지도를 그리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런데 용골대가 그린 그림을 받아 본 청 태종은 용골대에게 강의 위치,
조선 도성의 위치 등을 자세하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용골대가 대답하기를, "강은 산성 서쪽에 있고, 도성은 강 건너편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면서 꾸짖기를,
"네 말과 같이 강과 도성이 서편에 있으면, 남한산성의 산세가 응당 남북이 길고 서북이 짧을 것이거늘,
네 어찌 반대로 서를 길게 하고 남북을 짧게 그려왔는가.
빨리 다시 그려 오라. 만약 명대로 하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이에 용골대가 겁을 먹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서 남한산성의 성곽, 바위, 골짜기, 언덕 등을 빠짐없이
살피고 지도에 그렸다.
그리고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지도를 바쳤다.
청 태종은 용골대가 그려온 지도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벌봉이라는 바위가 있는 곳이다.
이 바위는 천상 벽력성의 정기가 깃든 바위이다. 이 벽력성은 남극성이 범하게 되면 망하고 만다.
그런데 나의 주성이 곧 남극성이니, 만일 조선 국왕이 벌봉을 안에다 두고 성을 쌓았더라면,
우리 청나라가 쉽게 남한산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벌봉이 성 밖에 있다.
장래에 우리가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 청나라 군사가 산성 밖에 있는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먼저 깨트리고,
벽력성의 정기를 말하면 산성을 쉽게 함락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조선 침략을 결정하였다.
마침내 청 태종은 조선을 침략하였고, 그의 예상대로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깨뜨렸다.
그랬더니 바위 위로 연기가 나면서 벌봉에 깃들었던 벽력성의 정기가 흩어져 마치 벌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달 후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공략하여, 마침내 인조의 항복을 받아 냈다.
후일에 나라에서 이 벌봉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는 다시는 임금이 무릎 꿇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벌봉 밖에다 성을 재차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벌봉이 마치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은,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벌봉에 어린 정기를 날려 버리려고 깨트렸던 자국이라고 한다. ↓
어렵게 벌봉에 올라서면 훌륭한 조망이 눈에들어온다 먼저 검단과 예봉이다 ↓
검단산에서 이어지는 고추봉과 용마산 라인 검단지맥 라인도 아름답다 ↓
검단지맥 라인 뒤쪽에는 유명산과 용문산이 한강기맥 라인을 볼수있다 ↓
방향을 바꾸면 남한선성과 우측으로 연주봉옹성 청량산이 조망되고 ↓
방향을 다시 조금틀면 북한산이 조망된다 ↓
벌봉밑에는 제단이 ↓
반대편에서 조망한 벌봉 ↓
벌봉에서 남한산으로
보이는 곳이 남한산 정상인데 정상석은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설치해 놓았구만 다만 정상에서 조금떨어진 곳에 설치가 되었더라 ↓
정상석이 설치된 장소다 ↓
남한산(南漢山) 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과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 일부에 걸쳐 있는 산이다.
주장산(晝長山), 일장산(日長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사적 제57호로 지정된 남한산성이 위치한다.
남한산은
일견 평범한 산처럼 보이지만 산속이 광대한 분지로 되어 있고
밖으로는 험한 경사를 이뤄 천혜의 요새지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청량산 482.6m, 벌봉 515m, 한봉 418m, 검단산 520m으로 이어지고 있어 산세의 구별이 모호하다.
산성은 정확히 말하면 청량산과 남한산에 걸쳐 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청량산과 같이 남한산맥의 지맥으로 분류되고 있다.
장경사(長慶寺:경기문화재자료 15) 등의 사찰이 있다.
산성 북서쪽으로 청량산(482.6m)이라 불리는 산쪽으로 수어장대가 있고
현절사(顯節祠:경기유형문화재 4)·청량전(淸凉殿)·숭렬전(崇烈殿)·연무관(演武館)·지수당(池水堂)·침과정(枕戈亭) 등이 있다.
성안에는 남한산 법화사지와 부도가 보존되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6호로 등록되어 있다.
이밖에 허물어져 가는 산성의 남문을 중수하여 보존하였고
마을 안쪽으로 임금이 납시어 활울 쏘았던 행궁터와 송암정(松巖亭)·관어정(觀魚亭)·영춘정(迎春亭) 같은 정자 등이
보존되고 있다. 1971년 3월 남한산성과 함께 총 36.4km2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산의 사방이 평지로 둘러싸여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일장산(日長山) 혹은 주장산(晝長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고주몽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백제국을 일으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온조는 현재의 서울 풍납동에 토성을 쌓고 위례성이라 하여 백제국을 세웠으나
지세가 불안하고 협소하여 이곳으로 천도했다.
또한 봉암성이라고 하는 벌봉을 둘러싸고 있는 남한산성의 외성에는
천혜의 요새답게 산세가 험해 병자호란 때 청태종과 청군이 이곳에서 진을 친 다음
전투는 하지 않고 인조와 조선군이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내려다보면서 항복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문은 좌익문, 서문은 우익문, 남문은 지화문, 북문은 전승문이라고 부르는데
얼마나 수호에 대한 염원이 어려 있는지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자주왔지만 이제는 정상석이 있어 새로운산 하나를 정복한 느낌이 든다 ↓
이제는 봉암성을 지나 하산길이다 ↓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이런 허물어진 성을 지날때면 황성옛터가 절로나오는데 여기도 곧 복원이 될것이다 ↓
정비를 잘해놓았다
어디 천국의 계단을 오른듯 하다 ↓
남한산을 뒤돌아본다 ↓
허물어진 성터에서 조망한다
비록낮은 산군들이지만 너울너울 보기좋다 ↓
봉암성이 조망된다
봉암성은 이름 그대로 벌바위다.
꿀을 만드는 벌처럼 생긴 바위라고 해서 ‘벌봉’ 혹은 ‘벌암’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남한산성 본성이 주장성의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봉우리로
해발이 무려 512.2m에 이른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보다 높이가 높기 때문에 벌봉의 정상에 오르면
남한산성의 서쪽과 동쪽 내부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
봉암성문을 빠져나가 ↓
봉암성 암문으로 빠져나간다 ↓
봉암성 3암문은 비밀통로라 한다는데 ↓
비밀통로를 빠져나와 이제 어디로 하산할까 고민이다
장경사로 하산할수있고 성벽따라 북문으로 하산할수있다
또한 현절사를 지나 산성로터리로 빠져나가 상가에서 점심먹고 시내버스를 타고 갈수가 있기에
하산을 그짝으로 정한다 ↓
등로를 잘 설치해놓았다 ↓
어디보자 여기도 최고의 조망처구만
아차산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
현절사를 지난다 ↓
현절사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상가들과 민가들이 보이고 ↓
여기 산성로터리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
여기 상가들은 거의 모든음식이 닭요리와 순두부요리가 판을 친다
여기저기 돌아보니 순대국을 파는 곳이 있어 순대국에다 막걸리 한잔 마시고
산성로터리에서 버스타고 집으로 귀가하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