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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속의 여유 두발로

서해랑길6코스『녹진관광단지~용장성』~폭염과의 싸움 본문

카테고리 없음

서해랑길6코스『녹진관광단지~용장성』~폭염과의 싸움

조장운 2024. 6. 14. 08:59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2001년 10월 30일 진도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1597년(선조 30) 9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거둔 명량대첩(鳴梁大捷) 승첩을 기념하고,

해전에서 순절한 진도 출신 참전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1956년 11월 29일 건립한 비석이다.
비신 높이 3.8m·폭 1.2m·두께 58cm 크기로, 비문(碑文)은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썼다.

벽파진(碧波津)은 명량해협의 길목으로,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였던 나루터를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李忠武公 碧波津 戰捷碑]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서해랑길 6코스』ㅡ28도의 기온에 항복한다 

◈언제 2024/06/ 12(요일)  

◈소재지: 전남 진도군

◈코스경로: 녹진관광단지→진도타워→벽파진전첩비→연동마을→용장성

거리 : 16.78km  7코스고군면까지 진행한 거리임

◈시간 :(느림 속의 여유시간)

◈교통자차  6코스 들머리에주차  자전거로 자차회수함

◈네비: 시작: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1-24 (관광안내도 부근)  

                  종료: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87-1 (진도용장성 주차장)

◈누구랑 : 마눌과 

◈날씨 : 맑음 폭염주위보 영상28도

◈시야와 조망 상태 보통 

 

6코스 지도 ↓

 

실제진행한 트랙과 고도표 

6코스끝나고 7코스 일부진행함(파란트랙)   ↓

 

산길샘 앱 통계

7코스 일부구간 고군면까지 진행한 통계임 ↓

 

 

 

  

아름다운경관 수많은특산물 문화예술이 살아숨쉬는 고장 진도로 오는 첫번째 관문 

명량대첩 승전보가 울렸던 현장이자 우리민족의 얼이 서려있는곳 

 

◐서해랑길 이야기 ◑ 

 

역시 진도가는 날은 은근히 부담이 된다 

거리와 이동시간이 만만치 않기에 또한 야간운전에 모든여건이 안좋지만 

그래도 자차로 이동하려면 이 방법이 제일 시간절약과 편한운전이기에 선택한것이다 

새벽2시에 기상 새벽3시에 출발 중간에 깨스충전하고 아침먹고 약 4시간 50여분만에 

여기 진도각 휴게소 들머리에 도착 차량을 주차한다  ↓

 

6코스 안내판에서 인증하고 출발한다  ↓

 

 

고개를 들어보니 안개속에 진도타워가 보인다

오늘서해랑길은 그쪽으로 이어지는것 같다 

초장부터 땀께나 흘릴것 같다  ↓

 

 

타워쪽으로 안가고

이길로 진행해도 무궁화동산에서 만난다 ↓

 

 

도로옆 인도길 따라  ↓

 

 

은근한 오름길에 벌써 이마에 땀방울 열리고 

안개에 습도가 높아 이미 몸속은 땀으로 배출할수 있도록 준비된것 같다 ↓

 

 

헉~헉 오르면서 고개드니 안개속에 터워가 조망되고  ↓

 

 

한고비 격으니 정상부 주차장이 나타난다  ↓

 

 

진도타워가 웅장하게 서 있고 

진도타워는

진도대교 근처에 있는 망금산 정상에 위치한다.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 등에서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진도타워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승전을 기념하고

진도군 관광의 랜드 마크로 군민들에게 자긍심을,

진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단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도타워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타워조망대에서 

진도대교와 울돌목을 조망해봅니다 안개속에 흐릿하기만 하네요  ↓

 

 

다리밑에 울돌목 바닷물흐름을 자세히 보니 마치 회오리치는 것처럼 빙빙 잡아돌면서 흐르네요  ↓

 

 

진도타워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조망하고 이제는 내려간다  ↓

 

 

진행해야할 서해랑길을 짐작해본다  ↓

 

 

조망  ↓

 

 

강강술레터 가는길 

내려가면서 살펴보고 싶었는데 그러한 터는 못 보고 진행한것 같다  ↓

 

 

데크따라  ↓

 

 

임도길따라 지그자그로  내려간다  ↓

 

 

내려가면서 올려다보고  ↓

 

 

세면길따라 내려가면  ↓

 

 

무궁화 동산이란다  ↓

 

 

무궁화 동산을 지나 이제는 좌측으로 바다를 조망하면서 

해안따라 진행한다 ↓

 

 

진도와 해남은 정말로 여럿작물을 재배 하는것 같다 이번에는 쪽파가 눈에들어오네요  ↓

 

 

조망  ↓

 

 

특별하게 인도는 없지만 

차량도 가뭄의 콩 나듯이 지나가기에 위험성은 덜하다  ↓

 

 

멀어져가는 진도타워  ↓

 

 

주위에는 양식장들이 ↓

 

 

얼마후 좌측으로 들어가라 하고  ↓

 

 

조망데크도 있고  ↓

 

 

짧은 습지보호구역을 지나간다  ↓

 

 

갯벌조망  ↓

 

 

계속해서 해안도로따라  ↓

 

 

갯골이라하죠?  ↓

 

 

직선 방조제도 지나가고  ↓

 

 

자세하게 보면은 게들이 

저거보니 몸이 근질근질 ㅎㅎㅎ  ↓

 

 

아직도 진도대교가 보이네요  ↓

 

 

이제는 지열까지 올라오고 얼굴이 따갑고  ↓

 

 

터널도 지나고  ↓

 

 

조망  ↓

 

 

바지선이 구조물을 매달고 지나는 광경을 봅니다 

어디 공사하러 가는것 같습니다 이것도 볼거리입니다  ↓

 

 

깜짝 놀랬네요 

100키로가 넘는 일주도로?  ↓

 

 

갯벌조망  ↓

 

 

절반 더 걸어왔네요  ↓

 

 

서해랑은 좌측으로  ↓

 

 

벽파마을로  ↓

 

 

마을골목길로  ↓

 

 

벽파진 나름기대했는데  실망입니다  ↓

 

 

그리고 벽파진 반대편에는 벽파정이  ↓

 

 

벽파정 위에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네요  ↓

 

 

벽파정에서 내려다보는 벽파진 

배들이 모두 육지로 올라왔네요  ↓

 

 

작은섬이 감부도라네요  ↓

 

 

양식장도 있고  물줄기가 시원하게 보입니다  ↓

 

 

벽파해안 제게 모래로 형성되었으면 

해수욕장이라 하겠죠? 갯벌이면 갯벌장이라 해야하나?  ↓

 

 

벽파항에서 이제는 이런언덕을  ↓

 

 

그리고 마을언덕도 오르고  ↓

 

 

언덕에서 갈 길을 살펴보니 

저산 낮은 줄기를 넘어야 할것 같네요 예상하지 못한 길입니다 

그리고 저 산을 넘으면 용장성 날머리입니다  ↓

 

연동마을 지나  ↓

 

 

특이한건 마을 대문기둥에 이런 종들이  ↓

 

 

그리고 이번 코스 하일라이트 임도길에 접어든다  ↓

 

역사공부나 합시다 

▣삼별초의 난 

정의

고려 무신정권기에 특수부대였던 삼별초가 몽고의 간섭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

 

역사적 배경

무인정권(武人政權) 말기 최우가 집권하여 도적이 횡행하자,

이들을 잡기 위해 용사를 선발,

경찰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야별초(夜別抄)라 하였다.

그 뒤 인원이 늘고 기구가 확대되어 좌별초·우별초로 나누어져 편성되었다.

이후에 몽고군에 잡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이 새로 신의군이라는 별초부대를 창설하였다.

이리하여 좌별초·우별초와 신의군이 합쳐서 삼별초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몽고와의 전쟁이 일어난 뒤 얼마 안 된 시기였다.

1232년(고종 19) 최씨정권이 정부를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의 전 시기를 통해 삼별초는 가장 강력한 전투병력이었다.

삼별초는 국가 재정에 의해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받는 등 권신의 사병과는 구별되었다.

그러나 권신의 정치권력과 너무 깊이 유착(癒着)되어 있어 사병적 성격이 농후하였다.

삼별초의 난의 기본적 요인은 우선 삼별초라는 강력한 전투병력이 권신들과 깊은

유착관계에 있었다는 정치적 특수상황에 있다 해야 할 것이다.

1259년 고려의 태자 전(뒤의 원종)이 부왕을 대신해

몽고에 입조(入朝)함으로써 30년간 계속된 몽고와의 전쟁은 종식되고 화평이 수복되었다.

이 때 최씨정권은 타도되어 일단 왕정이 복구된 형세였으나,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여전히 무인들이었다.

이러한 무인의 권력은 1270년(원종 11)까지 존속되었으며,

10여 년간의 고려의 내부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삼별초를 비롯한 무인들은 출륙환도(出陸還都), 즉 개경환도(開京還都)를 거부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결전(決戰)을 사양하지 않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왕실은 몽고에 접근, 무인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출륙환도를 단행함으로써

명실공히 왕정복구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반면 몽고는 배후에서 왕실을 조종해 반몽고세력을 배제하려고 획책하였다.

결국 강화도의 중신회의에서 개경환도를 확정하자 삼별초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삼별초의 성격과 경력으로 보아,

세력 근거지이며 항전의 군사기지인 강화도를 철수해 개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당시 개경은 몽고군에 호위된 국왕이 장악하고 있었고,

몽고의 대군(大軍)도 주둔해 있었다.

그러므로 환도는 삼별초의 해체를 의미하였다.

특히,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당한 상황에서 명부가 몽고군에 넘어가면 보복을 각오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별초는 강화도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몽고병과 싸워 적개심에 불타는 그들은 개경환도를 계기로 고려가

몽고에 종속화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일반 민중들도 친몽적인 왕실파의 패배주의적 태도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민간의 동향에 힘입어 삼별초는 그들의 반란을

반몽고·반정부의 자주·독립 수호운동으로 제고(提高)하였다.

 

발단

강화도의 중신회의에서 개경환도를 결의한 이후,

당시 몽골에 갔다가 돌아오던 원종은 삼별초의 동태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삼별초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자 원종은 삼별초의 폐지를 결의하고,

강압적으로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였다.

이에 삼별초는 그 명단이 몽골군에게 넘어갈 것으로 판단하여

1270년 6월 1일 배중손, 노영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

새로 왕을 세우고 관부를 설치한 삼별초는 반란 3일 뒤

공사 재물을 접수하고 강화도에 남아 있는 귀족·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배를 태워 진도로 보냈다.

이때 선박 1,000여 척이 동원되었다.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것은 몽고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섬에 강력한 군사기지를 설치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해 전략상 우위를 확보하려는 작전이었다.

진도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전라도 일대를 제압하였다.

해안 도서지방은 물론, 내륙지방도 점차로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스스로 진도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복속의 뜻을 표하는 자도 있었다.

이때 나주에 와 있던 전라도토적사참지정사(全羅道討賊使參知政事)

신사전(申思佺)과 전주부사 이빈(李彬)이 삼별초의 위세에 눌려 개경으로 도망쳐왔다.

전주·나주와 같은 내륙의 큰 도시도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다.

1270년 9월 조정에서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방경(金方慶)을 대신 전라도추토사(全羅道追討使)로 임명해 토벌을 명했고,

몽고의 원수 아해(阿海)도 동행하였다.

고려·몽고 연합군의 진격으로 형세는 약간 정부군에 유리하게 된 듯하였다.

그러나 삼별초의 기세는 꺾이지 않아,

전라도 지방의 도서와 해안은 물론,

경상도의 남해·거제·합포(合浦)[지금의 경상남도 마산]·동래·김주(金州)[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등지가

삼별초의 군사적 활동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11월 삼별초는 탐라(耽羅)[제주도]를 공략, 남방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전라도·경상도의 조운(漕運)이 차단되어 정부는 큰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고려·몽고의 연합군은 여러 차례 진도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271년 5월 홍다구(洪茶丘)가 새로운 몽고군 지휘관에 임명되면서

김방경·흔도(忻都)·홍다구의 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해 겨우 성공하였다.

이때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진도 함락 당시 남녀의 포로가 1만 여 명이었다고 하며,

그 가운데에는 인질로 잡힌 귀족·고관의 가족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삼별초는 파멸 직전의 타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여당들은 김통정(金通精)을 수령으로 받들고 본거지를 제주도로 옮겨 항전하였다.

제주도로 이동해 우선 방어진지의 구축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272년부터는 맹활동을 전개해 자주 본토를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요지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 해 11월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지금의 경기도 부천]를 공격해 부사와

그 처를 납치했고, 또 합포에서 전함 20척을 불태웠다.

남도의 세공(稅貢)을 해상에서 약탈해 조운에 큰 피해를 주었다.

 

결과

삼별초는 최후까지 분투했으나 기울어진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다.

원나라 세조(世祖)는 일본 정벌의 기지로서 탐라를 중요시해

1272년 8월 사신을 보내 탐라 공략에 대한 적극책을 촉구하였다.

이에 홍다구는 김통정에게 선무 공작을 폈으나 성과가 없자,

1273년 2월 김방경·흔도·홍다구의 연합군은 다시 탐라를 공격해 삼별초를 평정하였다.

이때 연합군은 병선 160척, 수륙군 1만 명인(고려군 6,000명, 몽고군 2,000명, 한군 2,000명)이었다.

4월 수령 김통정은 산중으로 피신했다가 죽고,

여당 1,300여 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리하여 삼별초의 반란은 약 3년 만에 진압되었다.

 

의의와 평가

삼별초가 고려·몽고 연합군의 우세한 병력의 공격에도 3년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삼별초가 매우 우수한 전투병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배후에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정부와 몽고군에 대해 투쟁하려는 굳은 결의가 민중 사회의 내부에 고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경상도 밀성군(密城郡)·청도군(淸道郡)의 농민들은 진도의 삼별초에

호응해 관헌을 습격하고 폭동을 일으켰다가 1271년 1월에 진압되기도 하였다.

또 같은 시기에 개경의 관노(官奴)들이 삼별초에 동조해 몽고의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정부 관료를 죽이고 진도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가 탄로되어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들은 당시 반정부·반몽적인 민중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들의 저항정신이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서로 동조하게 된 것은 삼별초 반란의 역사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고의 정책과, 조국의 예속화와 종속적 위치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 항거한 병사들의 폭동이었다.

이것이 민중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어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연합군을 상대로 3년간 버틸 수 있었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삼별초의 항쟁기간에 정부는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사태를 수습할 능력은 없었다.

그리하여 항상 몽고군의 군사적 원조를 받아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육지에 있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억압을 가하였다.

이것은 이미 왕실 중심의 고려왕조가 완전히 민심에서 이탈되어

몽고의 종속정권으로 전락되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별초의 난 [三別抄의 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막 피어나는것은 어느식물인든 귀엽고 앙징이고  ↓

 

 

집사람은 이미 지쳤다  ↓

 

갑자기 찾아오는 더위에 지쳤다 그늘도 별로 없다  ↓

 

 

먼저 올라와 집사람을 기다리면서 무료해서  ↓

 

 

이런 조망은 보너스로  ↓

 

 

어렵게 고개를 올라오고 이제는 내림길로  ↓

 

거의 다 내려온것 같다  ↓

 

 

뒤돌아보고 

저 낮은고개를 넘어온것이다  ↓

 

 

그리고 웅장성흥보관에 도착 

홍보관 안으로들어가니 미디어 교육관이 있고 

울 부부 만의 미디어 교육을 시켜준다 영상으로 교육을 받으니 이해가 빠르고 

주위를 한참이나 돌아다녔구만 ↓

 

 

기념관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조형도로 보면 다 보인다 ↓

 

◈진도 용장성(珍島 龍藏城) 또는 용장산성(龍藏山城) ◈

전라남도 진도군 용장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항쟁하던 고려가 원종 때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이 원종의 6촌인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항거하였는데,

이때 삼별초군이 대몽항쟁(1270~1271)의 근거지로 삼은 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섬의 둘레는 3만 8,741척, 높이 5척이라 하였을 뿐,

그 이상의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1964년 6월 10일 대한민국 사적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의 장군 배중손이 이끌던 삼별초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항쟁을 벌였던 장소이다.

고려 고종 18년(1231)부터 침략해 오던 몽골과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의 전쟁을 벌였으나, 

원종 11년(1270년) 고려 조정이 몽골에 항복을 하였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던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왕온(承化候 溫)을 왕으로 삼고 남쪽으로 내려와

진도에 궁궐과 성을 쌓고 몽골과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용장성이다.

지금은 용장산 기슭에 약간의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으며,

성 안에는 용장사가 있던 절터와 궁궐의 자리가 남아있다.

용장성 안에는 성황산이 있는데, 이 산에도 산성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성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하고 나름의 궁궐이 만들어진 점에서 가치있는 유적이다.

 

 

 

 

용장사도 조망하고  ↓

 

 

주위가 용장산성이란다  ↓

 

 

잘 관람하고 바로 밑에 주차장이 있고 

6코스 날머리다 여기서 종료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7코스까지 진행하기로 하고 바로 7코스로 이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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